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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의 새 구두

최은 지음 | 변형판형 (250*230) | 44쪽 | 값 15,000원 | 발행일  2021년 8월 30일 | 펴낸곳  바람의아이들| ISBN 979-11-6210-115-5

여름이의 새 구두

  • 엄마, 수제화가 뭐야?” “그 사람에게만 맞는 구두지.”

    세상에서 하나뿐인 구두, 여름이의 길고 긴 열흘 이야기

     

    바야흐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다. 무언가 유행을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물건을 사고, 소비경험을 공유하고, 때로는 같은 상품을 매개로 커뮤니티가 형성되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좀 머쓱하긴 하지만, 뭐 어쩌랴. 시대의 흐름이란 개인이 거스르기 어려운 법. 게다가 매일매일 쑥쑥 자라는 어린아이들에게 공장에서 찍어낸 값싼 옷과 신발은 유용한 점도 많다. 싸구려 플라스틱 장난감들이 아니면 날마다 새로운 재미를 원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만족시킬까. 21세기 어린이들에게 방망이 깎는 노인같은 이야기는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번도 보고 듣지 못했을 테니까.

    최은의 여름이의 새 구두수제화라는, 요즘 어린이들에게는 낯선 소재를 통해 기다림이라는 오래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림책이다. 어느 날, 동네에서 수제화 가게를 발견한 여름이. 수제화가 뭐냐고 묻자 엄마가 대답한다. 단 한 사람한테만 맞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구두지. 세상에, 이럴수가! 장갑도, 모자도, 가방도, 여름이의 물건은 많고 많지만 그런 건 다 친구들도 똑같이 갖고 있다. 하지만 내 발에만 맞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구두라니. 그렇다면 여름이에게도 당장 수제화가 필요하다. “엄마, 엄마, 나도 내 구두를 가지고 싶어!” 그리고 엄마와 함께 방문한 수제화 가게에서 주인아저씨는 여름이의 발을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치수를 잰 다음 말한다. “열흘 후에 오세요.”

    이야기는 수제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여름이의 하루하루를 보여준다. 열 밤쯤이야, 기다리는 것 하나는 자신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지? 엄마는 며칠인지 그만 좀 물어보라고 핀잔을 주지만 온종일 머릿속에는 구두 생각뿐이다. 아저씨는 내 구두를 잘 만들고 있을까? 엄마의 선물도, 급식 시간도, 화장실 차례도 너끈히 기다려 봤지만 세상에서 하나뿐인 구두를 기다리는 일은 여름이에게도 처음이니까. 기다리고, 버티고, 궁금해하고, 조바심을 내며 보낸 열흘, 마침내 여름이는 구두를 찾으러 간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물건을 기다린다는 것,

    그런 물건을 만든다는 것, 갖는다는 것

     

    여름이의 새 구두는 난생 처음 수제화를 맞추고 기다리는 여름이의 일상을 귀엽고 유머러스하게 스케치한다. 동글동글한 여름이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조바심이 어른거리고, 설렘과 두근거림, 단호함, 자신감 등 온갖 표정이 지나간다. 색연필과 수채물감을 이용한 부드러운 그림은 아이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 보이는 동시에 기다림으로 점점 부풀어올랐다가 지쳐 가는 모습도 재치있게 포착해 낸다. 엄마 아빠가 앉아 있는 소파 주위에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여덟 명의 여름이는 얼마나 가련한지.

    , 그렇다면 마침내 받아든 구두는 여름이의 마음에 쏙 들었을까? 조그만 발을 쏙 들이밀고, 자리에 일어서서 발바닥과 발등의 감각을 느끼고, 하나둘 하나둘 걸어도 보고,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나서는 이거다, 하고 만족했을까? 엄마 아빠와 구둣가게 아저씨가 여름이의 반응을 살피는 동안 여름이는 걷는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다. “어때?” 하고 온 세상이 귀 기울여 여름이의 대답을 들으려고 하지만 아직은 대답하기 어렵다. 기다림은 너무 길었고,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날이 왔으나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무언가를 원하고 기다리는 일이 언제나 제깍 기쁨과 만족감으로 보답받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세상에서 딱 하나뿐인 구두가 세상에서 딱 하나뿐인 임자를 만났으니 걸어가야지. 뚜벅뚜벅 씩씩하게, 세상 어디든 갈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여름이의 대답은 좀더 기다린 다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새 구두의 뒤꿈치가 좀더 부드러워지고, 가죽이 편안하게 낡고, 이런저런 얼룩도 생기고 나면 그때쯤 다시 한번 물어보자. 여름아, 새 구두 어때?

    여름이의 새 구두는 세상에 딱 하나뿐인 구두와 오랜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 뒤에는 구둣가게 아저씨의 이야기도 숨어 있다. 컨베이어 벨트가 쌩쌩 돌아가는 시대에 느릿느릿, 분통 터지게 오랫동안 하나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장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세상에서 딱 하나뿐인 물건에는 자기 재주와 솜씨를 정성껏 부려놓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여름이는 구두를 기다리는 동안 구둣가게 아저씨에 대해서도 궁금해한다. 그림책에서 수제화 제작 과정은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만들어낸 작디작은 구두 한 켤레에는 누군가의 시간과 정성, 기다림, 그리고 삶의 한 조각이 담기게 되는 것이다. 이건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똑같은 물건 중 하나를 골라오는 일과는 질적으로 다른 일이기도 하다.

    한편, 여름이가 수제화 맞춤이라는 낯선 경험을 관통하는 동안 옆에서 선선히 지켜보며 응원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도 눈여겨볼 만하다. 금세 발이 커져서 못 신게 될 텐데 엄마 아빠는 무슨 마음으로 조그만 아이에게 수제화를 맞춰 주었을까? 여름이에게 새 구두는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이렇게 여름이가 새 구두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가고, 그 시간은 이전에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생각과 느낌, 온갖 질문들로 꽉 채워진다. 여름이의 새 구두를 읽는 우리 모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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