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기 지음 | 국판 (148*210) | 240쪽 | 값 13,000원 | 발행일 2022년 04월 01일 | 펴낸곳 바람의아이들 | ISBN 979-11-6210-177-3 (44800) | SET ISBN| 978-89-90878-04-5
라플라스의 악마
근미래, 실직자들의 도시 ‘블린’
새 친구들과 함께 궁리연구소의 비밀에 다가가다
청소년들이 매사에 가볍다는 것은 기성세대가 갖고 있는 편견 중 하나인데, 말인즉슨 십대들이 진중하게 생각할 줄 모르고 자극적인 재미만 추구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편견에서 시작된 논리는 곧장 십대가 사회와 어른의 통제와 관리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생각 없는 아이들을 그냥 두었다가는 대책 없이 놀기나 하고 나쁜 길로 빠지기 십상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생각해보면 십대들만큼 자기 자신과 인간관계와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세대도 또 없다. 시간에 대해, 죽음에 대해, 우주를 포함한 이 세계에 대해 십대들만큼 매료되는 이들도 찾기 어렵다. 세상은 온통 수수께끼로 가득하고, 알아야 할 것과 배워야 할 것과 경험해야 할 것들이 천지다. 아무리 멍해 보이는 십대일지라도 실은 온몸으로 세상을 깨우쳐 나가느라 고군분투중인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은 십대들을 좀 더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용기의 SF 『라플라스의 악마』는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한 청소년들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현재로부터 불과 몇 십 년 후의 근미래, 판사인 엄마를 따라 실직자 도시로 이주해 간 시아는 그곳에서 새 친구들을 사귀는 한편, 궁극의 원리를 찾는 ‘궁리연구소’에 대해 듣고 궁금해 하게 된다. 이제는 폐쇄된 수명연장연구소와 궁리연구소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블린 시민들 다수가 검거된 ‘철조망 절단 사건’은 또 어떤 내막을 갖고 있는가. 수상쩍은 비밀 연구와 시민들의 의미 없는 삶이 얽혀 있는 상황에서 소년들이 최첨단 드론으로 무장한 채 로봇개에게 쫓기며 비밀에 다가간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지점은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줄기로 하면서도 그 바탕에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우치고자 하는 강렬한 지적 탐구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아의 지적 탐구가 단지 사고 실험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시아와 친구들이 드론을 날리거나 로봇개에게 쫓길 때, 자전거를 타고 황량한 벌판을 달리거나 숲속을 질주할 때 거기에는 청소년 고유의 에너지와 생명력이 넘실거린다. 십대가 아니라면 과학기술에 회의적인 비밀 조직에 매혹되거나 폐허가 된 연구소에 잠입해볼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편 시아가 새로 사귄 친구 해태와 마두는 이유 없는 호의와 우정을 베풀어 줌으로써 자칫 어둡고 우울해질 수 있는 시아를 건강한 삶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들을 통해 서로간의 힘겨룸이나 신경전 없는 친구 사이가 얼마나 순수하고 경쾌한지 새삼 느껴볼 수 있다. 모험과 지적 탐구를 함께하는 우정이란 청소년 SF의 핵심이기도 한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우리 삶을 끝없이 나아지게 할까
미래에서 날아온 궁극의 질문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시 ‘블린’은 실직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로봇이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을 담당한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기술로 인해 높은 생산성은 보장이 되지만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인간이 소외되면서 이 작품 속에서 실직자가 된 사람들은 무위도식의 삶을 살게 된다. 먹고 사는 일은 해결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이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블린은 노동과 생산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남아도는 시간을 보내는 데 골몰하는 도시다. 사람들은 임상테스트를 받는 대가로 최첨단 VR룸을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을 받고 가상현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소일한다. 『라플라스의 악마』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우리에게 밝은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기술낙관주의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듯하다.
작품 사이사이에는 시아가 읽는 이야기가 직접 인용되어 있는데, 뉴턴,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괴델에 이르는 과학사 에피소드들이 소개된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과학적 발견이나 이론 그 자체가 아니라 과학자들의 개인적인 삶과 인간적인 약점에 대해 들려준다. 이 위대한 과학자들은 우주 만물의 원리를 단번에 해명할 수 있는 ‘궁극의 원리’를 찾고자 평생을 바쳤지만 그러한 이론이 진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모든 물질의 운동과 위치를 알면 우주의 미래까지도 알 수 있다던 과학자 라플라스의 호언장담은 결국 과학에 대한 맹신을 두고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우주의 시작과 끝, 존재 양상에 대해 모든 걸 설명해주는 이른바 ‘궁극의 원리’를 찾고자 했던 과학자들의 이야기는 주인공 시아의 사색과 맞물리면서 과학자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이치에 대해 사고해보도록 이끈다.
『라플라스의 악마』는 실직자 도시에서 벌어진 ‘철조망 절단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과학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사고실험을 펼쳐놓는다. ‘궁극의 원리’를 찾는 이유가 그저 궁극의 원리 그 자체에 있다면 그 단 하나의 이론을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 과학기술이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 인간의 보다 행복한 삶을 위해 활용되어야 한다는 비밀단체 크라운의 목표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시아가 옛 친구 유리와 새 친구 해태, 마두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는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64의 비밀』 『무한 육각형의 표범』 등 본격적인 SF와 다양한 과학 저술에 몰두해온 작가는 『라플라스의 악마』를 통해 과학의 발전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간이 당면한 여러 문제와 고통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작 인간이 소외되었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당연하게도 작품이 정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사실 정답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하고,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다. 따라서 작가는 과학에 대한 낙관주의와 회의주의 사이에서 끝없이 궁리하고 온몸으로 부딪쳐 싸워나갈 주체로 십대들을 불러내고 있는 셈이다. 과학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독자들과 그러한 믿음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독자들 모두가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