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을동이 있어요
텅빈 해안가 마을, 남겨진 밭담
그곳에 곤을동이 있어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 4410. 바다를 향해 흐르던 화북천이 별도봉 동쪽에서 두 갈래로 나뉘고, 두 갈래 하천을 기준으로 가장 안쪽에 있는 안곤을, 가운데 있는 곤을, 가장 바깥에 있는 밧곤을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다. 제주 해안 마을이 모두 그렇듯 반농반어로 생계를 꾸리며 용천수를 식수로 사용하며 자그마한 공회당과 말방앗간도 있던 어여쁜 마을. 여전히 주소가 남아 있지만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 『곤을동이 있어요』는 바로 이 사라진 마을 곤을동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다.
우선 표지를 열면 면지에 제주의 푸른 바닷가 풍경이 펼쳐진다. 화면을 가득 메운 흐릿한 하늘과 바다, 저 멀리 높다랗게 솟은 등대와 항구의 실루엣,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 외에는 아주 조용하리라.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운 제주. 다시 책장을 넘기면 점점 바닷가 마을 곤을동이 가까워진다. 줌인. 양지바른 해안가에는 화사한 봄꽃이 한창이고, 그곳에는 검은 돌을 쌓아올린 밭담이 남아 있다.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만큼 방사탑(防邪塔)이 보인다. 제주 고유의 둥그런 탑은 본디 마을로 액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인데 곤을동에 세워진 탑은 어쩐지 등을 돌리고 홀로 앉아 있는 것 같다. 도대체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잘 지내나요?”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이미 슬픔에 젖어 있다. “나는 이끼가 낀 그대로예요”라고 말하는 화자는 아마도 마을을 내려다보는 커다란 바위일 것이다, 시간으로부터 비껴난 별도봉 바위는 “모든 것이 사라졌지만 모든 것이 생각납니다”라며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나 지금 곤을동에는 “잘 지내나요?”라는 안부 인사에 대답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1949년 1월 4일 한 날 한 시에 마을이 전부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짐작하겠지만 곤을동은 제주 4.3 당시 전소된 마을이다. 당시 곤을동에서만 24명이 희생되었고, 그곳에 살던 모든 이가 집을 잃었다. 제주도에서 군의 중산간 지역 초토화 작전으로 ‘잃어버린 마을’은 수십 군데에 달하지만 해안 마을로는 곤을동이 유일하다. 지금은 폐허가 된 채 흔적만 남아 있는 곤을동이 제주 4.3의 상징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제주 4.3의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곤을동
사라지고 없는 세계,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
『곤을동이 있어요』는 사라진 마을을 살려내며, 아주 옛날 정다운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의 사계절 풍경을 오롯이 담아낸다. 봄에는 애기구덕을 흔들며 자장가를 부르던 아낙들과 묵묵히 연자방아를 돌리던 키 작은 말, 여름에는 횃불을 밝히고 그물 가득 멸치를 길어올리던 사내들, 가을에는 하늘 가득 펄럭이던 감물 들인 옷감, 그리고 겨울에는 희고 포근한 눈 이불을 덮은 채 조용히 잠자는 초가집. 곤을동이 아름다운 만큼 그림책에 담긴 글과 그림도 곱디곱다.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 아기 자는 소리” “이어도 방애 이어도 방애” “엉허어야디야” 제주 고유의 자장가와 멸치잡이 노래, 연자방아 노래를 따다가 만든 글은 시처럼 아름답고, 정성들여 엮은 초가지붕과 울퉁불퉁 정겨운 담, 마을 곳곳을 수놓은 꽃과 나무 들과 함께 제주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세밀하게 옮겨놓은 그림은 꿈결 같다. 페이지 페이지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시공간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아기를 낳아 정성들여 키우고 철따라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며 제 몫의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은 이제 그곳에 없다. “너 빨갱이지? 폭도들 어디 숨겼어?” 하루아침에 평화로운 마을에 거칠고 무참한 군홧발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현재 곤을동 터에 남은 표석에는 이런 글이 남겨져 있다. “초가집 굴묵 연기와 멜 후리는 소리는 간데없고 억울한 망자의 원혼만 구천을 떠도는구나! 별도봉을 휘감아 도는 바닷바람 소리가 죽은 자에게는 안식을, 산 자에게는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제주 4.3은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무려 7년 7개월 동안 3만여 명의 민간인이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비극을 그저 ‘사건’이라 일컬으면 놓치는 게 너무 많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소박하게 일구던 삶을 통째로 빼앗긴 채 너무 오래 침묵을 강요당해온 역사가 있다. 그리하여 『곤을동이 있어요』는 잃어버린 세계를 복원하고 존재하지 않는 마을에 안부를 묻는 것으로 오랜 추념을 대신한다.
‘있다’라는 동사의 뜻은 “사람이나 동물이 어느 곳에서 떠나거나 벗어나지 아니하고 머물다”(표준국어대사전)이다. 너무나 예쁜 마을 곤을동은 지금 없다. 그러나 “곤을동이 있어요”라는 현재형 문장을 통해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다. 마치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표지와 그림책 앞뒤에 등장하는 어린 여자아이는 현재를 살며 과거를 돌아보는 우리 모두이자 직접 죄를 짓지 않았으되 슬픔과 기억을 결코 잃지 않을 어린 세대이기도 하다. “잘 지내나요?” 담담하지만 비탄에 잠긴 물음. 아마도 영원히 잘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폐허로 남은 곤을동을 생생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해원(解冤)을 할 수는 있을 터. 『곤을동이 있어요』는 제주 4.3을 기리는 눈물겹고 아름다운 그림책이다.